군민들이 찾은 장수군 문화유산
곽장근(국립군산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장)

얼마 전 장계면 삼봉리 탑동마을로 지표조사를 다녀왔다. 이 마을 남쪽에 큰골이 자리하고 있는데, 아무리 보고 또 봐도 그다지 크지 않은 골짜기다. 이보다 훨씬 더 웅장하고 깊은 골짜기도 큰골이라고 부르지 않는데, 무슨 이유로 큰골로 불리게 되었을까? 하루 종일 시간을 내어 큰골을 둘러보고 큰골에 숨겨진 역사의 비밀을 깨달았다.
장수군에서 가장 큰 들녘이 장계분지다. 이곳의 주산이 성주산(聖主山)으로 일제가 산봉우리 정상부에 측량용 기점을 박아 지금은 깃대봉으로 불린다. 성주산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산줄기에서 갈라진 산자락이 연꽃 봉우리 모양으로 감싼 길지에 탑동마을이 있다. 고기마을에서 옮긴 반파가야의 추정 왕궁터로 후백제 절터가 한 몸을 이루어 익산 왕궁리 유적과 일맥상통한다.

이 마을은 평상처럼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는데, 그 규모는 길이 300m, 너비 150m, 높이 5m 내외이다. 고대 판축의 석심(石心)시설과 배수로(排水路)가 확인되어, 평탄지가 사람의 힘으로 만든 인공적인 지형으로 밝혀졌다. 이 마을 북쪽 망거실봉 산봉우리에서 봉화와 관련된 장방형 대지와 남쪽 산자락 정상부에서 성벽으로 흔적도 확인되었다. 아직은 그 역사성을 검증하기 위한 학술 발굴조사가 미진하지만 반파가야의 추정 왕궁터로 손색이 없다.
반파가야의 추정 왕궁터 남쪽 골짜기가 큰골이다. 성주산 산줄기에서 다시 갈라진 산자락이 거의 반달 모양으로 큰골을 감싼다. 큰골 골짜기 경사면에 수많은 민묘가 빈틈없이 빼곡히 들어섰다. 지표조사 때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토기편과 자기편, 기와편 등이 큰골 평탄지에서 다량으로 수습되어, 이곳에 제사를 모신 사당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반파가야의 추정 왕궁터에서 남쪽으로 1km 떨어진 산봉우리에 장수 삼봉리 산성이 있다. 전북 동부에서 여덟 갈래의 봉화로가 실어 온 변방의 모든 정보를 취합하던 곳이다. 반파가야의 국운을 도맡은 핵심 국가시설이다. 조선시대 다섯 갈래 봉수로의 정보를 경복궁 혹은 창덕궁에 보고하였던 목멱산, 지금의 남산과 그 임무가 같다. 장수 삼봉리 산성과 추정 왕궁터는 반파가야의 핵심 국가시설이었다.

백화산(白華山)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여러 갈래 산줄기 정상부에 110여 기의 가야 고총이 무리 지어 있다. 장수군에서는 장수 삼봉리·장계리·호덕리 고분군을 하나로 묶어 장수 백화산 고분군이라고 새로운 이름을 지었다. 장수 삼봉리 가야 고총에서만 목관을 고정하는데 쓰인 꺾쇠가 다량으로 나와 반파가야의 최상급 분묘유적으로 평가를 받았다.
반파가야 추정 왕궁터에서 남쪽으로 1km 가량 떨어진 산줄기에 제사유적이 있다. 성주산(聖主山)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 정상부로 세 개의 산봉우리에 천지인(天地人)의 고대 우주관을 표현하였다. 반파가야가 고기마을에서 탑동마을로 왕궁을 옮길 때 난평마을 세 개의 알봉을 옮겨온 것이다. 영호남의 가야 영역에서 그 존재를 드러낸 최대 규모의 제사유적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또 다른 국가시설이 더 있다. 지난번에 소개한 태봉(胎封)으로 삼봉리 제사유적에서 남쪽으로 1km 가량 떨어진 산봉우리 정상부에 위치한다. 백두대간 구시봉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산줄기 끝자락으로 또 다른 장계분지의 명당이다. 아직은 태봉이 가야에서 최초의 사례이기 때문에 그 역사성을 속단할 수 없지만 중국 장태(藏胎)문화의 영향으로 판단된다.

위에서 살펴본 내용을 하나로 묶으면 가야계 봉화 왕국 반파가야의 존재가 실증된다. 그렇다 보니 큰골의 의미가 더 궁금해진다. 그것을 풀 실마리가 기록으로 전한다. 진(秦)나라 사람들이 노역을 피해 마한으로 망명해 오자, 그들을 마한의 동쪽 경계에 모여 살게 하였다고 문헌에 나온다. 반파가야만의 정체성인 삼봉과 태봉(胎封), 봉후저각(烽候邸閣), 요전(堯田) 등은 공교롭게 중국의 문화 요소다.
그런데도 동아시아 고대의 도읍에서 좌묘우사(左廟右社)가 남는다. 좌묘우사는 왕궁을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宗廟)를, 오른쪽에 사직단(社稷壇)을 배치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억측을 더 하면 큰골은 저절로 종묘가 된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국가 사당이다. 그리하여 자연은 작은골이지만 숙명적으로 큰골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우사(右社)에 해당하는 골짜기는 당거실골로 불린다. 대전통영간 고속도로와 익산장수간 고속도로 건설로 당거실골이 대부분 없어졌다. 당거실골 입구에 풍저마을이 있는데, 풍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한 마을 이름이다. 풍(豊)자에 의식(儀式) 때 쓰는 그릇이라는 의미와 저(儲)자에는 쌓다는 뜻이 있다. 당거실골과 풍저라는 지명을 근거로 당거실골에는 본래 제사유적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 고대 도성을 배치하는 기본 원칙 중 하나가 좌묘우사다. 이 원칙은 기원전부터 완성된 중국의 고대 도성 건설 규례서인 「주례(周禮)」「고공기(考工記)」에 기술되어 있다. 좌묘우사의 배치는 단순한 건축 원칙을 넘어 조상 숭배와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는 유교적 이념이 도시 공간에 구현되었다. 삼봉과 태봉, 성벽, 망거실봉, 좌묘우사를 통해서도 장계면 삼봉리 탑동마을에 추정 왕궁터의 존재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삼봉리 탑동마을 남쪽 큰골로 반달모양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상단부가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다.
삼봉리 탑동마을 남쪽 큰골로 반달모양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상단부가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다.
사진 중앙이 탑동마을이고, 우측이 큰골이며, 좌측이 익산장수간 , 상단부가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다.
사진 중앙이 탑동마을이고, 우측이 큰골이며, 좌측이 익산장수간 , 상단부가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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