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민들이 찾은 장수군 문화유산
곽장근(국립군산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장)

사진 중앙이 계남면 침곡리 고기마을이고, 우측이 국가 사적인 침령산성이며, 좌측이 반파가야의 봉화산 봉화다.
사진 중앙이 계남면 침곡리 고기마을이고, 우측이 국가 사적인 침령산성이며, 좌측이 반파가야의 봉화산 봉화다.

법화산에서 동북쪽으로 쭉 뻗어 내린 산줄기 끝자락에 고기마을이 있다.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자생 풍수상 최고의 혈처(穴處)로, 마치 연꽃 봉우리처럼 생긴 지형의 심장부에 마을이 위치한다. 기원전 84년 마한왕이 피난지로 삼은 지리산 달궁계곡 달궁 터 부럽지 않은 전북 동부에서 또 다른 길지(吉地)다.
이 마을을 들락거린지 30여 년이 넘었지만 얼마 전 배낭을 메고 네 번이나 더 고기마을로 지표조사를 다녀왔다. 지금도 30여 호가 모여 사는 상당히 큰 마을인데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로 '고기'라고 마을 이름을 지었을까? 너무 궁금하고 답답하여 계남면 침곡리 고기마을 황규수 어르신을 집으로 다시 찾아뵈었다.

사실 일 년 전 어르신으로부터 마무산과 분터골, 불당골 이야기를 듣고 마을 지명이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4대째 고기마을에 살고 계신 어르신은, 고기에서 고자는 옛 고(古)자고, 기자는 터기(基)로, 우리말로는 옛터라는 의미라고 아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었다. 천만다행으로 그날은 어르신이 마을 구석구석을 직접 둘러보면서 설명해 주어 마을 지명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마을 부근에 포진된 산 이름과 문화유산이 범상치 않았다. 이 마을 동쪽 백화산(白華山)은 관음도량으로 안산(案山)을 이루었고, 서북쪽에는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법한 법화산(法華山)이 아련히 시야에 들어왔다. 백화산과 법화산 사이 중간 지점에 고기마을이 있다. 이 두 산을 하나로 묶으면 장수군은 저절로 불국토(佛國土)가 된다.

2023년 국가 사적으로 승격된 장수 침령산성이 서북쪽에서 철통같이 고기마을을 엄호하고 있었고, 본래 세 개의 알봉으로 이루어진 화양리 난평(卵坪)마을 제사유적이 남쪽에 있다. 사실 금관가야를 세운 김수로왕도 알에서 태어났다. 모두 다 국가의 존재와 위상을 실증해 주는 장수군 문화유산들로 장수군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웅변해 준다.
1997년 후기 구석기 유적과 청동기시대 고인돌이 고기마을 부근에서 발굴되었다. 2025년 고기마을 동남쪽 마무산(馬舞山)에서 마한계 생활유적이 그 존재를 드러냈는데, 전북 동부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마한계 문화유산이다. 이 마을 동쪽 반달 모양으로 생긴 산자락에서는 마한부터 반파가야의 이른 시기 유물이 나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올 초 역사의 비밀을 풀 발굴조사가 시작될 예정이라고 한다.

지표조사 때 고기마을과 그 부근에서 상당히 넓은 평탄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전 경지정리사업이 이루어졌지만, 본래부터 넓었다고 황규수 어르신이 설명해 주어 고고학자를 더욱 흥분시켰다. 마한부터 조선까지 토기편과 자기편, 기와편이 다량으로 흩어져 왕궁 등 핵심 문화유산의 존재 가능성을 훨씬 더 높였다. 유적과 유물로 본 고기마을은 장수군 문화유산의 근간(根幹)이었다.
모두 세 차례의 지표조사에서 얻은 조사성과는 기대 이상으로 컸다. 이 마을 뒤쪽 산봉우리 정상부에 봉화대처럼 생긴 상당히 넓은 네모난 평탄지가 호기심을 자극하였고, 마한계 성책(城柵)이 고기마을을 휘감고 있을 개연성도 없지 않았다. 지난번 요전마을 성철훈 어르신이 제보한 요전(堯田)마을의 지명과 불당골의 절두평전이 고기마을의 위상과 역사성을 더 높였다.

본래 고기마을에 있었던 반파가야의 핵심 국가시설인 왕궁을 탑동마을로 옮기는 과정에 고기(古基), 즉 옛터라는 지명이 생기지 않았을까? 혹시 역사를 소중하게 인식한 조상들이 마한부터 반파가야의 이른 시기 역사를 지명에 새기지 않았을까? 이날 '지명은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다'라는 세간의 격언을 다시금 되새긴 뜻깊은 하루였다. 확언컨대 고고학에서 지표조사는 황금알을 얻는 과정이다.
중국 문헌에 진(秦)나라 사람들이 노역을 피해 마한으로 망명해 오자, 그들을 마한의 동쪽 경계에 모여 살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수군 등 전북 동부가 마한의 동쪽 경계로 추측된다. 장수군에 철기문화를 전해 준 주인공들로 고기·요전마을의 터도 그들이 닦지 않았을까? 전북 동부에서 마한의 정치 일번지가 고기마을이었다.

그날 장계면 소재지 '자연애 다슬기' 맛집에서 늦은 점심을 청하였다. 천하제일 다슬기탕을 시켜 맛있게 먹고 있었는데, 별안간 다슬기 수제비 한 그릇이 더 나왔다. 제가 시키지 않았다고 죽기 살기로 대들었지만, 주인이 막무가내로 더 먹으라고 억지로 권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군밤 장수 벙거지와 핫바지로 무장한 남루한 옷차림의 복덕(福德)이 아닌가 싶었다.

제보자, 황규수(010-9565-1450), 계남면 침곡리 고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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